[IP칼럼] “비밀유지권, 누구의 영역인가”... 기술 시대에 다시 묻는 제도의 경계형사 중심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IP 현실... 글로벌 기준은 이미 ‘확장’에 있다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변리사 비밀유지권 도입을 골자로 한 변리사법 개정안이 보류되면서, 지식재산(IP) 업계와 법조계 간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미 변호사에 대해서는 의뢰인과의 비밀유지권(ACP)이 제도적으로 인정된 상황에서, 변리사에게 동일한 보호를 부여할 것인가를 둘러싼 시각 차이가 본격화된 것이다.
“형사 방어권인가, 기술 보호 장치인가”
대한변호사협회는 비밀유지권의 본질을 형사사건 중심의 방어권으로 보고 있다. 즉, 의뢰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필요한 제도이며, 특허·영업비밀과 같은 기술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이 논리는 전통적인 법률 서비스 구조에서는 일정 부분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산업 구조가 더 이상 이 틀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IP는 ‘분쟁 이후’가 아니라 ‘분쟁 이전’에 존재한다
특허 출원, 기술 이전, 공동 연구, 투자 협상 등 대부분의 지식재산 활동은 분쟁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변리사에게 미공개 기술 구조, 핵심 알고리즘, 사업 전략 및 로드맵 등을 제공한다. 이는 단순한 법률 정보가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 그 자체인 ‘경제적 자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제도는 변호사에게는 보호를 부여하면서 핵심 기술 정보를 다루는 변리사에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글로벌 기준, 이미 ‘변리사 비밀유지권’은 일반화된 흐름
이 문제는 국내 논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요국은 이미 변리사 또는 특허대리인에게 일정 수준의 비밀유지권을 인정하고 있다.
2016년 미국 연방순회항소법원은 In re Queen’s University 사건에서 비변호사 특허대리인이 수행하는 특허 출원 및 심사 업무 범위 내에서 변호사와 유사한 일정 범위의 비밀유지권을 인정했다.
영국은 Copyright, Designs and Patents Act 1988 제280조에 “Privilege for communications with patent agents”를 명문화했다. 발명 보호와 관련된 특허대리인과의 통신에 비밀유지권을 인정하는 구조다.
독일은 특허변리사의 비밀유지의무가 특허변리사법(Patentanwaltsordnung)에 근거하며, 비밀유지의무뿐 아니라 법정에서의 증언거부권까지 인정한다. 즉, 단순 의무를 넘어 실질적 권리로 보호된다.
일본 변리사법과 민사소송법은 직무상 비밀 보호, 증언 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과 유사한 법체계 속에서 이미 제도가 자리 잡은 사례다.
한국만 ‘중간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비교에서 드러나는 것은 분명하다. 주요국은 변리사를 “기술을 다루는 단순 대리인”이 아니라 “비밀을 다루는 전문직”으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비밀유지권을 변호사는 보호 인정하지만 변리사에게는 입법 보류라는 현실이다. 선진국 대비 제도적으로 공백 상태에 놓여 있다.
직역 문제가 아니라 ‘신뢰 인프라’의 문제
이번 논쟁을 변호사와 변리사 간 직역 갈등으로 보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핵심은 "기업이 안심하고 기술을 맡길 수 있는가"다.
기술을 맡길 수 없는 환경에서는 정확한 권리 설계도, 전략적 특허 확보도, 글로벌 경쟁력 등은 기대하기 어렵다.
업계에서는 변리사 비밀유지권 문제를 직역 갈등이 아닌 ‘기술 보호 인프라’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특히 기술기업을 중심으로 핵심 정보 공유에 대한 법적 보호 필요성이 커지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정보 공개 범위를 제한하는 등 실무적 대응도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투자업계 역시 기술 보호 체계가 확보돼야 거래와 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업계 전반에서는 “비밀유지권 문제는 특정 직역의 권한 확대가 아니라, 기업이 안심하고 기술을 맡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증거 은닉”이 아니라 “범위 설계”의 문제
비밀유지권 확대에 대한 우려는 주로 증거 은닉 가능성에 집중된다. 그러나 이는 변호사 비밀유지권에서도 동일하게 존재하는 문제이며, 실제 제도는 예외 규정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즉, 쟁점은 “도입 여부”가 아니라 “어떤 범위와 조건으로 설계할 것인가”다.
AI, 반도체, 바이오 산업이 확대되면서 기술 정보는 곧 국가 경쟁력이 되고 있다. 이 환경에서 비밀유지권은 형사 방어권을 넘어 기술 보호를 위한 핵심 인프라로 기능한다.
비밀유지권은 더 이상 특정 직역의 권한 문제가 아니다. 기술을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제도의 공백을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다.
변리사에게 비밀유지권을 부여하는 것은 직역 확대가 아니라 기술 보호 체계를 완성하는 일이다. 국회가 이 논의를 다시 시작할 때 이 기준이 중심에 놓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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