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고③ 폐허에서 피어난 원자력 강국의 기적] 한양대와 서울대, "아무것도 없는 강의실에 원자력 간판을 걸다“
국제무대에서 원자력의 영토와 발판을 마련한 이승만 대통령이 그다음으로 주목한 핵심 동력은 역시 '사람'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 국제적인 기구가 확보되어 있어도, 그것을 직접 주도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없다면 원자력은 그저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1세기 지식 기반 경제의 핵심이 휴먼 캐피털(Human Capital)에 있음을 반세기 전에 꿰뚫어 본 이승만은, 대학에 정식으로 원자력 학과를 신설하여 국가 최고급 인재를 직접 길러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대학 교육 환경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기본적인 물리 실험 기구는커녕 제대로 된 전공 서적 한 권조차 구하기 힘든 열악한 시절이었다.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도 시기상조론과 함께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전기 유도 법칙도 제대로 가르치기 힘든 형편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시 세계의 최첨단 핵물리학과 원자력을 어떻게 가르치겠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뼈아픈 걱정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흔들림 없이 개혁을 밀어붙였다. 대학이 시대의 학문을 선도하고 앞서나가야만 국가 전체의 수준이 동반 상승한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전폭적인 행정적 지원에 힘입어 마침내 1958년, 공과대학으로 명성이 높던 한양대학교(당시 한양공과대학)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하는 대담한 모험을 감행했다. 사립 대학이 국가적 비전에 완벽히 발맞추어 선제적으로 첨단 미래 학과를 개설한 것은 한국 고등교육사에 영원히 기록될 대사건이었다.
이에 자극받아 이듬해인 1959년에는 국립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도 '원자력공학과'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초대 학과장으로 부임한 이창건 박사를 비롯한 선구적인 학자들은 아무런 인프라도 없는 맨땅에서 커리큘럼을 짜기 시작했다. 그들은 해외 최신 원서들을 간신히 구해보며 밤을 새워가며 강의 노트를 손으로 써 내려갔고, 열정 넘치는 학생들은 칠판에 분필로 그려진 조잡한 원자로 그림을 보며 조국의 원대한 미래를 가슴에 품었다.
당시 두 대학의 원자력공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수재들이었다. 나라에서 모든 사활을 걸고 밀어주는 학과라는 소문에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비록 비가 새는 초라한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자신들이 무너진 국가를 일으키고 첨단 에너지 자립을 달성할 역사적 소명을 짊어졌다는 거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정부는 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아끼지 않았고, 해외의 최신 과학 논문과 학술 자료들을 최우선적으로 공급했다. 한양대와 서울대의 척박한 교실에서 뿌려진 이 원자력 교육의 씨앗은 실로 위대한 기적을 낳았다. 이 교실에서 배출된 청년들이 먼 훗날 한국형 표준 원자로인 'OPR1000'과 세계 최고 수준의 'APR1400'을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원전 국산화를 이루는 핵심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는 이승만의 교육 입국(立國) 철학이 남긴 최고의 걸작이었던 셈이다. *[기고/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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