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 “AI 시대 사법혁신, 국경 넘는 IP 분쟁에 답을 찾다”특허법원 이혜진 판사, 국제 동향·특허법원 현황·미래형 재판 모델 ‘가상 국제법원’ 제안
특허법원 이혜진 고등법원 판사는 특허뉴스 창간20주년 기념 컨퍼런스 「AI x TECH x IP Summit 2025 : 기술패권과 산업혁신」 주제발표에서 ‘AI 시대, 사법시스템의 혁신’을 주제로 국제 지식재산(IP) 분쟁 환경의 변화와 특허법원의 대응, 그리고 기술 기반의 미래형 사법 모델을 제시했다.
이혜진 판사는 “지식재산권은 각국에 등록돼 있지만 분쟁은 동시다발적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진다”며, 기존의 국가별·법원별 절차를 넘어 시간과 비용을 줄이면서도 판단의 합리성과 예측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재판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제 IP 분쟁, ‘5가지 흐름’으로 재편
이 판사는 먼저 국제 지식재산권의 동향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핵심은 ▲조약과 다자협정을 통한 규범 조화(하모나이제이션) ▲EU를 중심으로 한 지역 통합(리지널 인테그레이션) ▲특허권을 보유하되 실시하지 않는 주체의 NPE 소송 증가 ▲유리한 법원과 판사를 찾아가는 포럼 쇼핑의 고도화 ▲국가별 판단이 유사한 방향으로 모이는 통합적 결론의 경향이다.
조약이 만든 ‘비슷해지는 규범’... 그러나 분쟁은 더 복잡해져
하모나이제이션은 파리협약·베른협약·PCT 등 국제 조약을 기반으로 국가 간 규범이 유사해지는 흐름을 의미한다. 이 판사는 “다수 국가 간 조약으로 묶이면서 어느 나라든 비슷한 규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다만 규범의 유사성이 곧 분쟁 해결의 단순화를 뜻하진 않는다. 오히려 기술·시장·소송 전략이 결합되면서 국제 분쟁은 더 정교해지고, 관할 선택과 절차 경쟁이 심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럽 ‘단일특허·UPC’... 통합의 효과와 ‘“all or nothing’ 리스크
지역 통합 사례로는 유럽의 단일특허(유니터리 패턴)와 통합특허법원(UPC)이 제시됐다. EU가 경제공동체를 기반으로 단일특허 체계를 도입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통합 법원을 출범시키면서 다국가 중복 소송·판결 불일치·높은 비용을 줄이려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다만, 이 판사는 UPC가 갖는 구조적 위험도 함께 짚었다. 단일특허가 여러 국가에 효력을 갖는 만큼 UPC에서 한 번 패소하면 해당 국가 전체에서 권리를 잃을 수 있는 ‘“all or nothing’ 효과가 나타날 수 있어, 기업들이 소 제기 여부를 두고 전략적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NPE 소송 증가... ‘분쟁 비용’이 혁신을 잠식할 수 있다
세 번째 흐름은 NPE(Non-Practicing Entity) 소송의 증가다. 이 판사는 NPE를 특허를 ‘소송 목적’으로 보유하는 이른바 ‘특허 트롤’형 NPE와, 라이선싱·거래를 통해 수익을 내는 사업형 NPE로 구분해 설명했다. 특히 소송 목적 NPE의 경우, 표적 기업이 대응에 막대한 시간·비용을 투입하게 되면서 혁신 활동이 위축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최근에는 ‘장롱 특허’로 불리는 권리들을 매입하되, 선지급 없이 사후 수익 발생 시 배분하는 계약 구조 등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도 확산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판사는 “NPE 소송은 미국만의 이슈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지속적으로 문제 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포럼 쇼핑 “법원도 고르고, 판사도 고른다”
네 번째로는 포럼 쇼핑의 고도화를 들었다. 당사자들은 ‘어느 나라가 유리한가’뿐 아니라 ‘어느 지역·어느 법원이 유리한가’를 계산해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 판사는 2022년 설문조사를 사례로 들며, 국제 특허분쟁에서 시장 규모가 큰 국가(미국·독일)가 선호되고, 미국 내에서는 텍사스·델라웨어, 독일에서는 뒤셀도르프·만하임 등이 자주 거론된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로는 ▲절차의 신속성 ▲낮은 무효율 ▲큰 손해배상 ▲가처분(금지명령)의 신속성 등, 결과와 절차 모두에서 ‘유리함’이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이 판사는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특허법원이 어떤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다부스(DABUS) 판결이 보여준 ‘통합적 결론’의 힘
다섯 번째 흐름은 ‘통합적 결론’이다. 이 판사는 AI 발명자성 논쟁으로 유명한 DABUS 사건을 예로 들어, 국가별로 절차와 판단의 결은 달라도 결국 ‘인간만이 발명자가 될 수 있다’는 방향으로 결론이 수렴해 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판사들은 다른 나라 판결을 찾아보고, 그 근거가 합리적이면 그 방향을 참고한다”는 점이다. IP 분쟁이 한 나라에만 존재하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만큼, 법원들 역시 서로의 판단을 참조하며 결과적으로 국제적 수렴(convergence)이 강화된다는 관찰이다.
특허법원, ‘아시아 최초 IP 고등법원’... 국제 분쟁 거점으로
이 판사는 특허법원의 정체성과 강점을 설명하며, 특허법원이 1998년 설립된 아시아 최초의 지식재산 고등법원이고, 대전 한 곳에 관할이 집중된 특수 고등법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즉 특허법원은 1심 법원이 아니라 항소심(심결취소 사건 등) 중심의 고등법원이며, 5개 재판부(국제재판부 포함) 체계로 운영된다.
최근 동향과 관련해 이 판사는 심결취소 사건뿐 아니라 침해 관련 민사 항소 사건이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외국 당사자 비율이 뚜렷하게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과거에는 외국 당사자가 주로 미국·일본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중국·유럽(벨기에·덴마크 등)까지 참여가 확대돼 국제 당사자 풀이 다양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판사는 “앞으로 섭외적 사건에서도 한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이 보인다”고 말했다.
국제재판부·원격재판... 통역·자막·영문 판결 송달까지 “실전 운영”
이 판사는 국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한 특허법원의 제도적 장치를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국제재판부 사건으로 지정되면 영어 문건 제출과 영어 변론이 가능하고, 당사자 원격 참여도 지원된다. 그러나 국제재판부로 가기 위해선 쌍방 동의와 재판부 승인이 필요해 실제 활용이 많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영어로만 해야 한다” “영문 제출이 필수”라는 오해도 신청을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외국 기업의 CEO나 법률상 대리인이 직접 절차에 참여하길 원하는 수요가 커지면서, 국제재판부의 기능이 실무에서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 이 판사의 진단이다.
리모와(RIMOWA) 디자인 사건, ‘원격 참여+절차협의+동시통역+자막’
국제재판부 운영 사례로는 독일 리모와 사건이 소개됐다. 핵심 쟁점은 선행 디자인(리모와의 수트케이스)을 근거로 이어폰 케이스(등록디자인)를 “통상의 디자이너가 용이하게 창작할 수 있는가”였다. 심판 단계에서 무효 판단이 내려졌고, 이에 대한 심결취소소송이 특허법원에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외국 당사자가 “직접 참여하고 싶다”는 요청을 하면서 국제재판부 사건으로 진행됐고, 법원은 ▲사전 절차협의(스케줄링 컨퍼런스) ▲동시통역 ▲자막(캡셔닝) ▲영문 판결 송달 등 지원을 결합해 하이브리드 방식(법정에는 대리인, 해외에는 당사자)으로 심리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당사자들은 변론 횟수·준비서면 양·PPT 사용·전문가 증인 등 주요 절차를 사전에 조율했고, 법원은 합의된 항목을 최대한 반영해 신속한 심리와 예측 가능한 일정 운영을 실현했다는 취지다.
머크(MERCK) 상표 분쟁, “5개국 동시 분쟁인데, 한국만 원격재판”
또 다른 사례는 머크 상표 분쟁이다. 이 사건은 독일 머크와 미국 머크가 ‘MERCK’ 사용 범위를 두고 갈등해 왔고, 인터넷 시대에 미국 머크의 ‘merck.com’ 접근 가능성이 전 세계로 확장되면서 웹사이트가 ‘상표적 사용’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됐다. 동일한 쟁점으로 스위스·영국·프랑스·독일·한국 등 여러 국가에서 소송이 진행되는 구조였는데, 이 판사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처럼 화상 재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머크 사건은 국제재판부가 아니라 국제 영상 재판(International Remote Hearing)으로 진행돼 당사자 동의 없이도 해외 당사자의 원격 참여가 가능했고, 당사자 측 통역사 활용과 법원의 기술적 지원(통역 부스·줌 캡셔닝 등)이 결합됐다. 이 판사는 해외 CEO들이 “직접 진술 기회를 준 점”과 “기술 기반 참여 방식”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전했다.
특허법원의 ‘AI 시대 인프라’... 전자소송과 기술심리관
이 판사는 사법 혁신의 토대로 전자소송과 기술심리관 제도를 강조했다. 특허법원은 2010년 전자소송 시스템을 도입해 문건과 증거 제출·열람이 전자적으로 이뤄진다. 당사자는 서류 제출을 위해 법원에 직접 올 필요가 줄어들고, 원격 시스템과 결합될 경우 심리 효율이 크게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이 판사는 “전자소송과 화상 시스템이 결합될 때 시너지 효과가 크다”며, 잘 구축된 화상 재판 환경에서는 증거 제시와 프레젠테이션 이해도가 높아져 재판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기계·전기전자·화학·약학·통신·농업 등 분야별 박사급 인력으로 구성된 기술심리관 23명이 재판부를 지원해, 고도 기술 분쟁에서 사실인정과 쟁점 정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소개했다. 판사 개인의 전공과 무관하게 첨단 기술을 정확히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가 특허법원의 강점이라는 평가다.
통합법원 대신 “공동심리+각자판결”... 가상 국제법원 구상
발표의 핵심 제안은 미래형 사법 모델이다. 이 판사는 UPC처럼 제도·문화·법률의 통합을 전제로 하는 모델은 유럽의 역사와 경제공동체라는 특수한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다른 지역에서 동일한 방식이 재현되기엔 현실적 제약이 크다고 봤다. 대신 그는 원격 기술을 활용해 ‘통합법원 없이도 통합적 효과’를 구현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구상은 이렇다.
당사자가 소 제기 시 한국·일본·싱가포르 등 복수 국가를 선택한다(일종의 ‘동시 제소’ 효과). 사건의 쟁점이 동일하면, 선택된 국가 법원들이 화상·인터넷·메타버스 등 기술을 통해 공동으로 심리한다(같은 증거·같은 프레젠테이션·같은 질문). 그러나 판결은 각국 법률·판례에 따라 각자 독립적으로 내린다.
그 결과, 일부 국가에서는 승소하고 일부에서는 패소할 수 있지만, 당사자는 시간·비용을 크게 줄이고, 법원은 서로의 심리 과정을 보며 판단의 일관성과 합리성을 높일 가능성이 커진다.
이 판사는 “이 모델은 헌법·법률을 대대적으로 바꾸거나 외국 판사를 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절차 협의와 기술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접근”이라며, 사법 시스템이 기술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혁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발표에서는 AI 도구(예: 생성형 AI)를 활용해 ‘미래 법정’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경험을 공유하며, “AI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거부가 아니라 활용과 설계”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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